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곳은, 우리는, 오늘은
– 입과손스튜디오, <판소리 레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2023) 리뷰 –
손 옥 주 (공연학자)
우리네 인생은 대체 어디로 가고자 한단 말이오.
전쟁, 혁명, 가난, 역병, 갈 곳 잃은 문명의 꽁무니에서
볕들 날만 기다리는 삶들이 어찌 아니 불쌍하랴.
– <판소리 레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 중에서
빅토르 위고의 역작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초판이 발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인 1862년이었다. 원문 분량만 해도 2,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당대 공화주의자들이 군주제의 폐지를 외치며 시도했던 6월 봉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는 동시에, 그와 같은 시대상을 삶의 조건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애처롭고 비극적이며 불쌍한’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러나 실제 혁명가들의 염원을 담은 6월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던 것과는 달리, 위고는 시대와 삶의 변화를 혁명적으로 꿈꾸던 불쌍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혹은 서로를 구원하는 순간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불쌍함의 이면을 그려낸다. 가난하고 힘겨운 오늘을 가까스로 살아가면서도 타인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내미는 사람들의 이야기. 삶의 한계에 봉착해 있지만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의 삶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소설 속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반추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입과손스튜디오'(이하 ‘입과손’)가 판소리 창작을 위한 텍스트로 <레 미제라블>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위고의 원작이 항구적인 주제 의식과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이 읽히는 각 시대의 동시대성을 투영해낸다는 점에서 ‘입과손’이 그동안 추구해온 예술적 지향점, 즉 ‘판소리 장르에 대한 동시대적 이해와 해석’이라는 맥락과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번 <판소리 레미제라블-구구선 사람들>(이하 <구구선 사람들>)을 통해 창작자들은 원작을 단순히 번안, 각색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자신들의 관점을 바탕으로 다시쓰기(rewriting)를 시도하는데, 이는 다음의 질문들을 파생시킨다: ‘이처럼 세계적인 원작을 다시 쓰려는 이유는 무엇이며, 다시쓰기의 행위를 통해 새로이 실천되거나 실현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이를 보고 듣는 관객은 무엇을 새로이 경험하게 되는가.’
이와 관련해 이번 <구구선 사람들>이 보이는 인상 깊은 특징 가운데 하나인 제작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이번 작품은 처음부터 완창형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지난 2019년부터 3년간 매해 한 편씩 제작, 발표된 3편의 신작 단편(토막소리)을 편집의 과정을 거쳐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낸 결과물이다. 이는 전통 판소리의 창작 과정, 즉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작가(소리꾼)들이 만든 토막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긴 서사가 되는”(출처: 프로그램북 31쪽) 과정에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구구선 사람들>의 경우에는 전 세계적으로 익히 알려진 유명 소설의 내용 일부를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선택, 취합, 편집, 재구성해 토막소리를 구성해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창작 방식에 대한 창의적 계승을 시도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같은 계승의 양상은 ‘입과손’의 궁극적인 지향점, 다시 말해 ‘옛것의 익힘(溫故)’ 이후에 도래하는 ‘입과손’만의 창작 관점과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입과손’의 창작자들은 다시쓰기의 대상이 되는 원작 <레 미제라블>을 선정한 후, 수많은 작중인물 가운데에서도 주인공 장발장과 더불어, 가난한 미혼모 팡틴(방미영), 혁명가 청년 마리우스(백군), 거리의 꼬마 장사꾼 가브로슈(가열찬)를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로 선택했다. 주인공의 주인공화(化)에 몰두해온 전통 판소리와는 달리, ‘입과손’은 주변 인물의 서사에 주목함으로써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사회의 보편적 단면을 드러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서사 구조 전반을 보다 입체적으로 구성해낸다. 이처럼 <구구선 사람들>의 중심에는 한 사람의 주인공이 아닌, “언제나 씹고 또 씹어도 단물이 나는 ‘인물들”(출처: 프로그램북 32쪽)이 지나온 짧지만 긴, 어설프지만 뜨거운, 투박하지만 진실된 삶의 시간이 놓여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삶의 시간에 대한 성찰이 이번 창작 과정의 배경을 이룬다.
<구구선 사람들>을 살펴보는데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창작적 요소는 바로 작품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구구선’이라는 공간이다. “늘 100에 닿지 못하고 99에 그치고 마는 모자란 세상”(출처: 프로그램북 <들어가는 글>)에 대한 비유이기도 한 이 거대한 배는 (마치 베케트의 ‘고도’가 그러했듯이) 언제나 뭍을 향하지만 정작 단 한 번도 뭍에 가닿은 적이 없는, 희망의 공간이자 상실과 실패의 공간이기도 하다. 구구선은 거주지인 상부의 타운구구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각종 추진 장치들로 채워진 하부의 엔진구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타운구구는 또다시 각 지역의 기능, 역할, 경제력 등의 기준에 따라 동구구, 서구구, 남구구, 북구구로 나뉜다. <구구선 사람들>의 서사는 그중에서도 하위주체들의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북구구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처럼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입과손’만의 가상적 공간 설정과 각 공간에 부여된 특정한 의미를 작품 진행의 축으로 삼음으로써 창작자들의 질문은 ‘영역화되고 구획화된 불쌍한 사람들’이 상징하는 공간의 사회적 의미와 공간의 정치성으로까지 확장된다.
작품 말미에 이르면 그동안 넋이 빠질 때까지 소외시키고 소외되며, 쫓고 쫓기며, 죽었다가 살아나며 뭍을 찾던 사람들의 눈앞에 그토록 찾던 바로 그곳, 육지가 보인다. 저기 뭍이 보인다는 9살 꼬마 가열찬의 한 마디 외침에, 사람들은 아이의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천천히 모여든다. 이 순간을 마지막으로 <구구선 사람들>의 모든 장면은 끝을 맺는다. 110분간 작품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이끌어온 소리꾼 이승희가 들려주는 마지막 엇중모리처럼, 뭍을 발견한 이들이 마침내 닻을 내렸을지, 아니면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을지, 그도 아니면 다시 표류를 시작했을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의 완료나 상실 혹은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방향이 근본적으로 ‘리셋’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에 가깝다. 닻을 내리거나 내리지 않는 등의 모든 가능성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작품이 향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입과손’이 궁극적으로 던지고자 했던 질문은 다시금 환기되는 것이 아닐까. 어질 더질.
우리가 탄 ‘세상’은 지금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을까?
– 프로그램북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