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혁명과 사랑이 필요한 시대
_한 인물이 겪은 혁명과 사랑의 서사에 주목하여

어둠 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화면은 어둠에 잠겨 있는 공간을 짧게 훑는다. 거친 콘크리트 벽면, 가느다란 조명과 작은 창 너머 희미한 빛이 화면을 스친다. “월급을 올려주세요. 제 월급으로는 쉼 없이 일해도 집세 내기가 빠듯합니다.” 한 소리꾼의 목소리가 어두컴컴한 공간에 울린다. 그 뒤로 웅성웅성 높고 낮은 소리가 짙게 깔린다.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이다. 열심히 일해도 살아내기 힘든 사회 시스템, 제 몫의 일을 하는 이들이 목소리와 존엄을 잃어버리는 삶, 노동도 정의도 청춘도 사랑도 온전히 지켜지지 못하는 세상.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는 지금 무얼 해야 할까. 입과손스튜디오의 두 번째 <레미제라블> 토막 시리즈는 ‘신군’이라는 인물의 입과 손으로 원작의 마리우스라는 인물이 경험한 혁명과 사랑의 서사에 주목한다. 그렇게 150년 전 이야기였던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지금 이 시대, 바로 우리의 곁으로 데려다 놓는다. 세상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혁명과 사랑의 불꽃을 겪은 이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곱씹어본다. 새로울 것이 없기에 서글프지만, 그래서 반갑고 위로가 되는 이야기로 말이다.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시리즈 ‘마리우스’ 공연 중에서

도입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공간은 아마 앤트 홀, 개미굴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신군과 그의 친구들은 ‘민중의 벗’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한다. 원작에서는 ‘아베쎄의 벗들(Les amis de l’ABC)’이라 불렸는데 프랑스어 아베쎄(Abaissé)를 알파벳(ABC)으로 표현한 일종의 언어유희로, ‘비천한 이들의 친구’라는 뜻이라 한다. 우리 곁의 ‘민중의 벗’, 일명 F4에는 신군 말고도 권군과 남군과 조군이 있다. 각각 민요와 장구, 아쟁과 기타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블랙홀 같은 매력을 발산하며 관객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끈다. F4의 이름은 ‘민중의 벗’을 연기한 민요소리꾼 신승태와 그룹 ‘상자루’ 연주자들의 실제 성과도 일치한다. 입과손스튜디어가 숨겨둔 일종의 재치이자, 아마 소리꾼과 연주자의 삶 역시 민중의 벗들과 겹쳐지는 모습이 있음을 잘 포착한 언어유희가 아니었을까.

개미굴 바깥의 상황과 배경은 두 명의 소리꾼의 입으로 전해진다. 두 소리꾼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민요 소리꾼의 노래와 상자루의 연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면면을 소개한다. 탁자 위로 핑퐁 공을 주고받듯 이야기가 오간다. 최저임금 협상으로 시작된 변화의 기운을 반란으로 볼 것인가, 혁명으로 볼 것인가. 혁명에 투지를 불태우다 봄바람과 함께 운명처럼 시작된 신군의 사랑은 어디로 흐를 것인가. 두 소리꾼은 이렇듯 첨예한 두 입장을 대변하는 대변가가 되기도 하고, 인물 바깥의 속사정을 속사포처럼 읊어주는 해설자가 되기도 한다. 두 소리꾼이 간혹 눈빛을 교환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호흡을 맞추는 장면은 전통 판소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드물고 매혹적인 찰나이다.

이번 시리즈의 또 다른 매력은 민요와 판소리가 지닌 고유함이 얼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자장을 넓힐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리우스’를 통해 민요와 판소리가 사랑가(歌)로도, 혁명가(歌)로도 참으로 근사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평화가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올 때, ‘누구나 마음껏 꿈꾸고 아무도 버려지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향할 때, 장르는 그 형식을 넘어 위기의 순간 우리가 부르고 싶은, 우리 곁을 지키는 노래가 된다.

토막 시리즈이기에 엿볼 수 있는 특별한 대목도 있다. 그 중 특히 신군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입과손스튜디오의 <레미제라블> 시리즈 전작인 ‘팡틴’에 흘렀던 노래가 같은 소리꾼의 목소리로 재현된다. 전작에서는 외롭고 쓸쓸한 여성의 단면을 묘사하는 노래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다시 불린 노래 위로 신군의 사랑가가 포개진다. 다양한 인물의 삶이 겹쳐지고, 과거와 현재의 계보가 이어지는 이야기, 시리즈의 묘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판소리계의 ‘B급 갬성’이란 이런 걸까. 작정하고 웃으라고 연출한 장면에서는 깔깔깔 숨넘어가다가, 구슬프고 서글픈 상황이 흐르는 장면에서는 크흡 하고 숨과 눈물을 함께 삼키게 된다. 참신하고도 진지한 작품 앞에 자꾸만 고꾸라질 것만 같다. 혁명이냐, 사랑이냐. 너무 오래되고 고전적인 물음 아닌가? 지금 우리에게 ‘마리우스’의 이야기가 왜 필요할까. 다시 어둠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나고, 마지막 노래를 흥얼거리며 답을 구해 본다. ‘불불불 불어라, 어기여차 불면은, 새 세상이 온단다’. 지금이야말로 혁명과 사랑이 필요한 시대니까.

 

_글 미쉘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