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가면을 쓴 사람들 사이의 민낯,
가난하고 아름다운 여자 ‘팡틴’을 바라보는
미쉘 보코의 시선

★★★★★
”판소리 레미제라블은 팡틴의 삶을 한 가운데에 두고 이야기를 다시 직조한다.
팡틴을 통해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온몸으로 통과해 낸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는 매혹적인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생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의 갈림길에 마주 선 우리처럼, 이야기 속 주인공들도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한다. 인물의 선택이 시대의 모순적인 구조와 생의 우연이 빚어내는 장면을 섬세하고 날카롭게 보여줄수록, 우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깊이 마음에 품는다. 어떤 이야기들은 힘이 강해서 긴 시간 여러 세대에 걸쳐 널리 퍼지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역시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 중 하나다. 1862년 발표된 이래 뮤지컬,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되어 왔다.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해법, 민중의 삶과 사회 개혁 의지를 담은 작가의 문제의식은 15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가 처한 구조와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원제를 직역하면 ‘비참한 자들’이다. 제목에 걸맞게 다양한 결의 인물이 등장해 당시 시대상과 주어진 세계를 뛰어 넘기 위한 삶의 선택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체로 많은 역사적 기록물과 예술 작품에서 그러하듯, 길이길이 회자되는 입체적인 인물과 상징적인 사건은 남성 서사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주목받는다. 다음 세대에 이어질 인류 보편의 물음을 길어 올리는 일도, 좌절의 순간 구체적인 절망의 모양을 전하는 일도 남성의 입이 더 많다.

‘레미제라블’ 역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장발장’의 이야기로 기억해오지 않았는가? 한 남성 인물이 주어진 역경을 딛고, 권력을 쟁취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여성은 어디 있었는가? 입과손스튜디오의 신작, 판소리 레미제라블이 첫 번째 이야기로 ‘팡틴’을 꼽은 것은 이 지점에서 흥미롭고 반갑다. 장발장이 도둑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헌신적인 시장으로, 변화를 꿈꾸는 혁명가로, 생의 극적 순간을 맞이하는 동안, 장발장 못지않게 중요 비중의 여성 인물로 등장하는 팡틴은 가난한 고아에서 공장 노동자로, 미혼모로, 성매매 여성으로 생을 마감한다. 판소리 레미제라블은 이런 팡틴의 삶을 한 가운데에 두고 이야기를 다시 직조한다. 팡틴을 통해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온몸으로 통과해 낸 한 여성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시리즈 팡틴(PANTINE) 공연 중에서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났고, 죽음을 향해 가는 모든 시간을 치열하게 살아낸 여성. 스스로를 돌봤고, 사랑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노동을 하며, 아이를 양육했다. 이 여성이 가진 특이점이라 할만한 것은 실은 그다지 특이한 것도 아니었는데, 굳이 마른빨래를 구기듯 쥐어짜 보자면 이런 것들이다. 지독한 빈곤의 사슬 끝에 가난을 끌어안고 태어났다는 것. 외모가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는 것.

여자는 일찍 일어나는 새처럼 구구구 소리를 내며 이른 아침부터 바지런히 거리를 쏘다닌다. 음식과 일자리를 구하고 외로움을 달래며 생의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태생적인 가난에는 혐오의 언어가 뒤따른다. 챙챙 가난이 부딪치는 소리가 여자의 평생을 괴롭힌다. 아름다운 외모에는 낙인의 언어가 덕지덕지 붙는다. 가진 게 없는데 아름다움을 가지면 ‘주제를 모르는 아름다움’이 된다. 문란한 년, 난잡한 년, 거지 년, 나쁜 년, 수군수군 꿀꺽. 여성에 대한 혐오와 낙인의 뿌리는 길고도 질겨서 150년 전 프랑스나 21세기 한국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직장에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횡행하고, 워킹맘은 하루아침에 경(력)단(절)녀가 되고, 여성 주 양육자는 커피 한 잔만 마셔도 맘충 소리를 듣고, 외모 품평회는 오프라인을 넘어 n번방을 뒤덮어 여기저기 수군수군 꿀꺽. 한 인간의 존엄한 삶이 안줏거리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오랜 시간 ‘레미제라블’의 팡틴은 아름다움과 모성애의 상징으로 머물러 있었다. 불쌍한 고아로 태어나, 부잣집 도련님과 사랑에 빠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로 자라서, 가난한 주제에 매력적이라 부도덕한 짓을 일삼다가,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죽어간 팡틴. 판소리 레미제라블은 사회의 기준을 판가름하는 네모난 잣대에 팡틴을 억지로 욱여넣지 않는다. 보란 듯이 무대는 둥근 원 위에서 펼쳐진다. 모성 신화와 가녀린 아름다움에 가려 온전히 주목받지 못한 한 여성의 복잡한 내면과 사회적 현실을 춤과 소리로 전한다. 탈꾼은 몸짓에 팡틴의 삶을 가만히 얹는다. 팡틴을 위로하듯 소리꾼은 움직임에 의미를 담고 이름을 붙여준다. 고수는 멀찌감치 앉아 리듬을 짓는다. 누군가 했을 감탄, 동조, 탄식의 말을 간결하고 강하게 터뜨린다. 이 여성의 삶이 위태로울 때마다 고수의 목소리를 대신해 경고음이 울린다. 여성의 삶은 단순히 주목받음으로써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한다. 새로 쓰일 필요도 없다. 이미 이 시대에도 비슷한 삶의 모양을 가진 여성들이 많으니까. 그 모든 삶을 위로하는 판이 여기 깔렸다.

나는 팡틴에게서 나 이전의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교육에 한이 맺혀 이제라도 배워야겠다며 야학에서 시를 쓰는 할머니, 한 시절 국가 경제를 뒷받침하는 공순이라 불렸던 고모,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며 일자리를 찾는 워킹맘 이모, 취집하라는 말을 신물 나게 들어도 원서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언니. 모욕과 치욕에도 의지와 의연함으로 맞서는 여성들. 인생의 고비에 경로 이탈 경고음이 울려도 도망치지 않는 여성들. 가면을 쓴 적 없는 여성들. 어느 시대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영혼을 활활 태우며 살아 있는 여성들. 내 옆의 여성들.

– 글쓴이 미쉘 보코